히스기야의 꿈틀대는 자만심(이사야서 39:1-4)
왜 우리는 조금만 편해지면 곧바로 자만하게 되는가? 병에서 회복하게 된 히스기야는 곧바로 자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도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
히스기야는 병에서 회복이 되었을 때(“그때에”), 멀리 바벨론에서 사신이 도착을 했다. 바벨론은 당시 작은 나라였지만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주변 국가들의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사신을 유다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 사신들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보물 창고를 열어서 보물을 보여주었다. 아직은 앗수르에게 보물을 빼앗기지 않았기에 제법 많이 있었다. 바벨론 사신이 왔을 때 히스기야는 기분이 좋았다. 먼 나라인 바벨론이 자기와 유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래서 보물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왔다. 그리고 추궁을 한다. 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라고 표현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허영심과 자만심을 드러낸 히스기야의 행동은 이전 아하스 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히스기야는 신정국가를 지키고자 했지만 인간적인 수단을 드러내고 있다. 신정국가의 왕처럼 행동하지 않고 세상 나라 왕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 히스기야를 질책하는 것은 선지자의 의무였다.
이사야는 질문 형태로 접근한다. 첫째, 바벨론과 어떻게 접촉을 하게 되었는지와 둘째, 물질적 화려함과 과시에 대한 자랑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이 무슨 말을 했느냐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히스기야의 대답에 점층적인 흐름이 있다: “그들이 원방에서 내게 왔다”, 즉 원방에서 왔고, 바벨론으로부터 왔다. 훗날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 중심지가 된다. 앗수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항이 느부갓네살 통치 아래서 바벨론이 중심이 된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을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다행히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고, 숨김없이 진실하게 고백하였다.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