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싱클레어 퍼거슨이 쓴 ‘진짜 회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주>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마치 소설과도 같다. 브란덴부르그의 알버트는 마인츠의 감독 자리와 그와 함께 차지할 수 있는 전 독일의 대주교직을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거 소유의 독일 최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교황에게 지불했다. 그리고 그것의 대가로 감독직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토에서 8년 동안이나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면죄부는 영혼을 일정기간 동안-형편에 따라서는 영원토록-연옥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 다단했다. 알버트는 자신의 대출금을 해결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면죄부 판매로 창출되는 “이익”은 성베드로 성당과 후거 은행 사이에서 50대 50으로 나누어 분배되었다. 새로운 수석 대주교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내 면죄부 판매원이 필요했고, 면죄부 대상인 요하네스 텟젤이 그 역할을 위하여 채용되었다. 텟젤은 화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들이 고통의 불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탄원하고 있다며 자녀들을 자극하였다. 그는 박사 학위 심사를 받을 당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가르침이었으며, 텟젤의 복음이었고, 이것이 당시 기독교의 일반적인 형국이었다. 1517년 가을, 이 면죄부 대상인 비텐베르그 근교에 거주하며 교구민을 모아 자신의 설교를 듣게 하고 상품을 구매하도록 재촉하였다. 월말 이었던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 밤, 근심과 고뇌에 사로잡힌 서른 세 살의 어거스틴 수도회 수도사는 조용이 성당 문에 벽보를 게시했다. 그 벽보는 일련의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논쟁과 변호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는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성경 교수였으며, 학자였고, 교사였으며, 당시 평민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라틴어로 논지를 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영적인 혁명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수도사의 이름은 마틴 루터이며, 그 벽보는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으로 역사 속에서 영국의 대헌장이나 미국의 독립선언서 이상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터의 반박문은 교회를 뒤흔들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까지 역사의 위대한 복음주의적 신앙고백 중의 하나로 칭송 받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나는 굳건히 서 있겠습니다. 나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라는 루터의 신념에 호소하며 견고한 입장을 지켜가고 있다.
루터의 반박문의 첫 번째 선언은 중세신학이라는 나무의 뿌리에 도끼 날을 올려놓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의 주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신장들의 전 생애가 회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던 중에 당시 천주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라틴어 성경이 마태복음 4:17의 “회개하라”를 “고해성사를 하라”로 잘못 해석하였고, 예수님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복음이 참회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고 있으며 삶을 깊은 변화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훗날 교구 목사였던 요하네스 스타우피츠에게 이 놀라운 발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저는 헬라어가 말하는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라틴어가 말하는 행위를 더 강조하는 자들이 틀렸다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루터의 이 위대한 발견이 축이 되어 종교개혁이 발발하게 되었다. 회심은 전 삶의 특성이며 한 순간의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다. 구원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지금 현재도 구원바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주 그리스도를 아는데 이를 수 없다. (싱클레어 퍼거슨)